다음은 아래 참고자료에서 가져온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참고자료 :
-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와 존 웨슬리(John Wesley) —갈등과 화해, 박창훈 (서울신학대학교 조교수, 역사신학)
애즈베리는 실존 인물의 이름이다.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는 존 웨슬리와 동시대의 사람이며 미국 감리교(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시작한 인물이다. 동쪽을 뜻하는 “Ash”와 요새를 뜻하는 “Bury”였기에 강력
한 성읍 또는 동쪽의 요새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애즈베리는 직접 말을 타고 개척지를 누비며 순회설교를 했다고 한다. 웨슬리는 설교를 통해서도 미국 독립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역설했다. 더 나아가 독립전쟁 과정에서 경제적인 어려움과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미국을 향해,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까지 지적하였다. 애즈베리는 미국 독립전쟁 자체에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치적인 혁명인 독립전쟁은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독립전쟁 자체를 그의 기본적인 관심인 복음전파를 위해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가 독립전쟁에 대해 분명한 입장으로 기운 것을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 귀한분이 미국 정치에 그렇게 관여하다니 정말로 유감이다.” 애즈베리는 독립전쟁에서 분명한 입장을 가진 강경파 웨슬리와 는 달리 “비정치적”으로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윽고 미국내에 있는 영국 설교자들에게 철수하라는 랭킨의 편지를 받았을 때, 기도와 금식을 통해 애즈베리는 영국으로 돌아간 6명을 제외하고는 뎀스터와 함께 미국에 남았다.
나는 우리가 미국에서 얻은,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이 모인 들판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우리의 보호를 원하는 3,000명의 영혼을 남겨둔다는 것은
메소디스트의 영원한 불명예가 될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양떼를 위험한
시기에 남겨둔다는 것도 선한 목자의 역할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들을 떠나지 않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애즈베리는 미 국 설교자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을 받고 있었다. 애즈베리는 현장에 대한 경험과 설교자들의 동의를 통해 미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감리사가 되었다. 웨슬리는 자신이 애즈베리를 감리사로 계획한 것인 데 애즈베리가 감독이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교만을 부린 것이라고 비난 하였다. 미국의 감리교회가 설립되고 애즈베리가 감독으로 선출된 배경에는 분명히 웨슬리의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실제적인 상황은 웨 슬리가 계획한 것 이상으로 진행되었고, 웨슬리의 의도가 선명하지 않았 기에 감리교회는 애즈베리를 감독으로 하는 문자 그대로의 ‘감리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메소디스트들(특히 웨슬리)과 미국 감리교회는 불편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웨슬리는 노예제에 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애즈베리가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지 적당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남부 감리교도들이 소유한 노예에 대해서 마 지못해서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감리교회가 생기던 1784년의 크리스마스 연회에서는 분명히 노 예제의 폐지를 결정하였고, 노예를 부리는 감리교도들은 연차적으로 노예 를 해방하도록 조치를 했다. 애즈베리는 사실 그의 저널에서 노예제 반 대운동에 대해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애즈베리는 노예제 반대운동 이 남부인들 사이에서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 이다. 다시 말해 노예제 반대에 대한 관심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 대한 헌신만큼 강하지 않았다. 결국 전체 교회를 위해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자신의 개인적인 궁극적 관심, 즉 영혼을 구 원하기 위한 복음전파를 위한 헌신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51) 이러한 태도 는 그가 독립전쟁에 취했던 “비정치적” 태도와 유사한 것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 1725년은 그의 신앙성장에서 중요한 계기를 갖는다. 특히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하게 살고 거룩하게 죽는 규율과 훈련』(Rules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을 읽은 후, 거룩한 삶은 시간 관리라는 것을 깨닫고, 테일러의 제안을 따라 일기(Diary)를 쓰기 시작했 다. 이 일기는 성결한 삶의 성장을 측정하는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후 에 메소디스트에 가입하는 이들에게 경건을 위해 일기를 쓸 것을 강조하였다. 엄격한 규율을 통해 공동체를 위 한 성결한 모습을 찾기를 기대한 웨슬리는 1743년 북부지방의 뉴캐슬 (Newcastle)에서 복음을 따르지 않는 회원 64명을 제명하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애즈베리는 미국으로 가는 선상에서 부터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후에 저널로 출판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회복은 웨슬리안 신학이라는 공통점, 즉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적 규율의 강조, 순회설교시스템, 그리고 부흥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체험과 1739년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의 체험 이후,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이 늘어나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심 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설교방법인 옥외설교를 시작하였다. 옥외설교는 당 시 국교회의 교회법에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웨 슬리는 처음에는 주저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옥외설교에서 기대하지 못했 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은혜를 받는 부흥의 사건이 일어나자, 이 방법 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 애즈베리는 이 부흥의 불길이 델라 웨어를 거쳐 켄터키로 향하는 것을 알았고, 그 가운데 캠프 미팅(Camp Meeting)을 목격하였다. 애즈베리가 경험한 미국 남부의 부흥은 바로 이 캠프 미팅을 통한 부흥운동이었다. 일단 캠프 미팅이 일반화되자, 캠프 미팅은 감리교가 가장 애용하는 대중집회의 형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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